호세 리살은 요즘 시쳇말로 '엄친아'다. 필리핀 라구나주 칼람바의 부유한 지주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예술과 철학, 약학, 의학을 공부했고, 다작의 시인이자 특파원, 소설가였으며, 건축과 경제, 인류학, 사회학, 무술과 펜싱, 사격에도 조예가 깊었고 11개 언어를 구사했다. 스페인 식민통치하에 얼마든지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랜 식민통치를 받던 필리핀을 향한 연민과 안타까움을 외면하지 않은 그는 스페인의 심장을 향해 펜대를 겨누었다.
그가 필리핀의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892년, 유럽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면서였다.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된 필리핀연맹을 결성하고 합법적 형태의 사회개혁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미 그는 유학 시절 탈고한 < 나를 건드리지 마라 > 는 소설로 필리핀 민중을 계몽하면서 식민당국의 '공적'으로 지목된 상황이었다.
그의 노선은 어린 시절 식민통치의 모순을 겪으면서 서서히 형성됐다는 게 정설이다. 10살 때 자신의 모친 테오도라가 친척을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재판도 받지 않은 채 16㎞ 떨어진 산타 크루즈의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가족들의 줄기찬 탄원 끝에 2년 반 만에 풀려난 일이나, 26살 때 칼람바의 농민들에게 지대를 높여 거두려던 수도사들에게 맞서다가 스페인 군인들에 의해 온 가족이 추방되고 살던 집이 파괴됐던 경험 등이 차곡차곡 쌓였던 것이다.
하지만 독립운동의 싹이 커질 것을 우려한 스페인 식민당국은 그를 체포해 다피탄 섬으로 1892년 유형을 보냈다. 이곳에서 각종 교육사업에 매진했으나 1896년 민족주의 비밀 결사단체인 카티푸난이 일으킨 폭동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체포돼 35살의 나이에 공개처형됐다. 그의 죽음을 구심점으로 필리핀 독립운동의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신격화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나 베트남의 호찌민과 달리 리살에 대한 후세의 평가에는 논란이 남아 있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흠결, 식민당국에 자신의 저작과 발언을 취소했다는 주장 때문이다. 한 역사학자는 그가 혁명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두려워했다고 기록했다. 실제로 혁명 전투에 참여한 적이 없다는 점도 문제로 제기된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구심점으로 필리핀 독립운동이 본격화됐다는 점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의 처형일은 '호세 리살의 날'로 기념되며,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로하스 거리에는 그를 기념해 세운 리살 공원과 그의 동상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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