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식 논은 우리말로 '다랑이'라고 부른다. 산골짜기 비탈에 층층으로 된 좁고 작은 논배미를 일컫는다. 필리핀 코르디예라(Cordilleras) 자치지역에 있는 방대한 규모의 계단식 논, 이른바 라이스 테라스(Rice Terraces)를 소개한다.

◆하늘로 오르는 거인의 계단

코르디예라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약 300㎞ 떨어져 있다. 마닐라에서 버스를 타고 10시간 안팎을 달리면 코르디예라의 이푸가오(Ifugao) 주에 닿게 된다. 이푸가오는 지명인 동시에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산악부족의 이름이기도 하다. 약 2천 년 전부터 이곳에 계단식 논을 만든 이들이 바로 이푸가오 족이다. 한(漢)족이 만리장성을 쌓고, 로마가 유럽과 지중해를 누빌 때 이푸가오 족은 해발 1천~2천ｍ 고지대에 먹고살 방편으로 계단식 논을 조성했다.

이푸가오 주의 계단식 논은 바나우에(Banaue), 하파오(Hapao), 바타드(Batad)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푸가오 족의 선조들은 수풀이 우거진 야산을 개간, 물을 가둘 수 있도록 평지화해 경작지로 탈바꿈시켰다. 논둑은 돌과 진흙을 이용해 쌓았다. 벼농사에 필수적인 관개(灌漑) 시설은 대나무관(管)을 이용해 구축했다. 그렇게 한층 한층 생겨난 다랑이가 100층이 넘는 곳도 있다. 맨 아래 논이 가장 먼저 만든 것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나이가 젊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유구한 세월이 산기슭에 새겨진 셈이다. 논둑을 모두 이으면 길이가 지구 반 바퀴인 약 2만㎞에 이른다고 한다.


코르딜레라 계단식 논은 보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 아래에서 보면 하늘로 오르는 거인의 계단처럼, 위에서 보면 지형도의 빼곡한 등고선처럼 느껴진다. 2천년을 지나오며 오직 사람의 손으로 빚은 이 대작(大作)은 초록이 넘실대는 모내기철에, 논이 황금색으로 물드는 수확기에 특히 아름답다고 한다. 그 미적 가치는 필리핀 정부의 공인을 받아 현재 최고액권인 1천 페소 지폐의 도안으로 이용되고 있다.

코르디예라 계단식 논은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통해 전 세계에 이름이 알려지면서 그 유명세도 동시에 치러야 했다. 관광객 급증은 수천 년 간 잘 보존된 다랑이가 훼손되는 결과를 낳았다. 전망 좋은 곳의 논두렁은 수만 명의 발길에 여지없이 허물어져 내렸다.

이푸가오 족 사람들 또한 농사보다 쉽고 벌이가 좋은 관광서비스업으로 눈을 돌렸다. 더 나은 생활을 찾아 도시로 떠나는 젊은이들도 급증했다. 산간마을에서 태어나 다랑이에서 뛰어놀다 농군이 되고, 다 늙으면 논두렁을 베고 생을 마감하던 이푸가오 족의 한살이는 사실상 대가 끊겼다. 일손이 줄고 휴경지가 늘면서 살판난 것은 길이가 30㎝가 넘는 지렁이들뿐이었다. 전통 마을의 해체로 예전처럼 지렁이를 잡지 못하자 논둑 파괴는 더 가속화됐다. 유네스코는 결국 2001년 코르디예라 계단식 논을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고 말았다.

글/장성배 기자(up@yna.co.kr)ㆍ사진/필리핀관광청 한국사무소